5월 김병준 교수님의 강연 후기는 중국 고대사와 문헌학을 공부하는 이정우 선생님이 기고를 해 주셨습니다. 강연 영상 시청에 앞서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다시 생각한다
– 김병준 서울대 교수님의 『사기』 「대완열전(大宛列傳)」 강의 및 관련 논문을 읽고 -
이정우
사학도로서 다소 상투적인 소개 문구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릴 적부터 필자는 사마천을 존경해 왔었다. 필자의 인식 속 중국 고대사는 『사기(史記)』 등 전래문헌과 이에 기반한 2차 창작 매체들에 상당히 빚을 지고 있었다. 궁형(宮刑)의 치욕을 당하면서까지 역사서를 저술했던 그의 의연한 모습과 수많은 고사성어의 배경이 된, 국가와 가문들의 흥망성쇠는 그에 대한 존경과 중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사마천에 관한 필자의 생각은 학부·석사 진학 후 크게 변화했다. 갑골문(甲骨文)·금문(金文)·죽간(竹簡)·백서(帛書) 등 고대 중국 출토문헌(出土文獻)을 접하게 되면서, 『사기(史記)』에 오류가 다소 존재하며, 저자 개인도 자신을 처벌한 한무제(漢武帝)에 대한 사적 감정을 은연중 역사서에 분출하지 않았을까, 혹은 두려워서 적지 못하고 숨긴 내용이 많지 않았을까, 그렇게 손쉽게 생각하고 비판했다. 그렇게 마음속 ‘사마천 상(像)’을 냉전 시기 말 독재자처럼 격하시키고 나서, 필자는 중국 고대사, 특히 선진사(先秦史)에 관심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강연과 후속 토론을 듣고, 이제는 사마천을 복권(復權)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에서 언급한 통념들이 강연에서 대거 반박되었기 때문이다. 이 강연 후기에서는 우선 첫째, 강연과 토론의 내용을 개괄하고, 둘째, 필자 본인의 연구뿐만 아니라 관심 있을 독자들을 위해, 김병준 선생님의 『사기(史記)』 연구 논문 몇 가지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대완열전(大宛列傳)」 위작설이 나온 배경과 그에 대한 반박
이 강연은 강연자의 여타 『사기』 강연 및 논문들과 마찬가지로, 역사가로서 사마천의 노력과 『사기(史記)』 130권 속 저자의 의도를 재고찰하는 시도의 일환이다. 사마천이 쓴 「대완열전(大宛列傳)」도 일견 제목과 내용이 모순적이다. 「외국열전(外國列傳)」으로서 대완(大宛)을 전문적으로 소개했을 것이라는 독자의 예상과 달리, 장건(張騫)·이광리(李廣利), 그리고 서역제국(西域諸國)의 일화가 혼재되어 있다. 따라서 「대완열전」의 위작(僞作)·찬입(竄入) 설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강연에서는 「대완열전」을 위작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열전의 내용이 세밀한 인과 관계와 서술적 장치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먼저 「대완열전」이 후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복사했다는 위작설은, 「대완열전」에 『한서』보다 고어(古語)형의 낱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열전의 내용도 『한서』와 별개의 정보에 토대를 두고 집필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반박될 수 있다. 「대완열전」이 장건(張騫)·이광리(李廣利)의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제목이 붙었으며, 후세 역사서들에도 실린 ‘서역전(西域傳)’의 시초가 된 까닭은, 대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및 서역 국가들과의 군사·외교적 접촉과 이를 통해 확보된 구체적 지식 및 정보를 최초로 기재했기 때문이다.
강연은 「대완열전」에 비체계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왜 기록되었는지 설명한다. 우선 사마천은 열전의 문두(文頭)를 대완(大宛)으로 시작하고, 대완이 알려진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 장건을 거론한다. 장건은 대완과 서역 각국을 방문한 걸 계기로, 고생 끝에 한무제(漢武帝)로부터 서역착공(西域鑿空)이라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주한다. 그 추진 과정에서 장건이 소개한 대완국의 한혈마(汗血馬)가 알려진다. 무제는 이를 천마(天馬)라 칭하며, 관심을 두고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의 실정(失政) 등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한나라 사신 피살(殺漢使) 등 일련의 사건들로 대완과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군사적 선택밖에 남지 않게 된다. 결국 이광리가 대완 원정에 착수한다. 원정은 성공했지만 큰 피해를 초래했고, 무제의 집착과 고집이 불러낸 실패가 부각된다. (이 설명에서 사료에 대한 강연자의 세밀한 독해와 고찰이 돋보인다. 장황한 듯 보여도 세부 사항들이 모두 정벌의 필연성과 그에 대한 평가를 위해 연결되었음에 주목해서 들어야, 역사 기록으로서 「대완열전」의 진수를 볼 수 있다.)
만약 이 열전이 후세인의 오해처럼 장건의 열전에 가깝다면, 문두부터 장건의 자(字)와 개인사, 성장 배경 등에 대한 언급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사마천은 그보다 한(漢)이 왜 대완을 정벌했는지 그 원인(遠因)부터 시작해 근인(近因)까지 논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장건과 대완, 이광리와 대완, 그리고 대완과 관계된 서역 각국과 사건들을 하나의 내러티브(narrative)로 풀어나간 것이다. 나아가 사마천은 대완을 중심에 둔 이 열전을 통해, 한무제(漢武帝)의 야욕에서 비롯된, 무리한 대외 팽창들과 그것을 조장하고 거기에 참여한 장상(將相)들을 비판하였다. 사마천의 여타 외국 열전 서술도 이러한 양상이 나타난다. 사마천은 그것을 단순히 외국에 대한 사실(史實)만을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 역사 기록을 통해 외국 정벌의 배경을 근본적 원인부터 구체적으로 논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했다. 「조선열전(朝鮮列傳)」이 위만(衛滿) 이전의 고조선(古朝鮮)을 언급하지 않고, 고조선 정벌의 배경과 전개, 그 결말을 논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김병준 선생님과 고대사 연구자들의 토론
쉼 없이 이어진 2시간의 강연 이후, 중국 고대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진귀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먼저 최진묵 선생님께서 ‘宛’의 독음과 관련하여, 「대완열전(大宛列傳)」의 명칭 통일 문제에 관해 질문하셨다. 해당 열전을 「대원열전(大宛列傳)」이라고도 읽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성시훈 선생님께서는 사마천 개인의 한무제에 대한 감정이나 비판이 『사기』에 어떻게 투영되었을지에 대해 질문하셨다. 김용하 선생님께서는 「대완열전」에 기재된 『우본기(禹本紀)』의 실체에 대해 질문하셨고, 이에 따라 사마천 시대 「본기」와 「표(表)」 개념의 논의가 이어졌다. 지난달 연구소에서 초간(楚簡)을 주제로 강연하신 김석진 선생님께서는 ‘제국(帝國)의 역사서’로서 『사기(史記)』를 어떻게 인식할지,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을 질문했다. 지난달 대면 학술대회에서 의고(疑古)·신고(信古) 논쟁을 주제로 발표하신 심재훈 선생님께서는 「대완열전」의 연대와 사마천의 『사기』 저술 과정에서의 자료적 한계 등에 대해 질문하셨다. 이동철 선생님께서는 중문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사기』 속 신화(神話)적 사고방식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셨다. 마지막으로 김용하 선생님께서 다시금 우리가 사마천의 『사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활용할지에 대해 질문하셨다. 비슷한 질문을 가진 독자들은 강연 후반부의 토론을 참고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 필자도 이 토론을 듣고 기존에 궁금했던 것들이 많이 해소되었다.
김병준 선생님의 『사기(史記)』 다시 읽기
상술한 「조선열전(朝鮮列傳)」과 관련하여, 이미 많은 독자가 알고 있겠지만, 김병준 선생님의 「漢이 구성한 고조선 멸망 과정-『사기』 조선열전의 재검토-(2008)」 라는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저자는 『사기』를 연구한 중국사 연구자의 관점에서, 「조선열전」을 만든 한(漢) 측의 내적 논리 조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천착하였다. 논문에 따르면, 「조선열전」은 고조선 역사를 그대로 전하기보다 한(漢)의 입장에서 고조선 멸망의 인과를 효과적으로 재구성하고, 고조선에 대한 침공을 합리화·정당화하는 글이다. 해당 열전은 사마천 개인의 주관이 아닌, 반란을 다룬 한(漢)의 공식 보고에 기반을 두고 작성했을 것인데, 다른 외국 열전과 제후왕 반란 기사에서도 조선열전과 유사한 서술이 보이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기존에 한국고대사의 관점에서 「조선열전」을 다뤄온 것과 차별적인 시도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외에도 동일 저자의 논문으로서 「사마천은 왜 책을 덮었을까?: 『사기』 권74 맹자순경열전의 서사 분석(2021)」과 「司馬遷의 비판적 《論語》 읽기와 그 서사 ― 學而篇 ‘有子曰’의 사례(2022)」을 참고할 수 있다. 전자는 맹자(孟子)와 순경(荀卿) 사이에 그들과 무관한 추연(鄒衍), 순우곤(淳于髡) 등의 인물이 다수 합전(合傳)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한 문제를 논하였다. 많은 학인(學人)과 연구자들이 이를 오독(誤讀)했지만, 열전의 내용을 상세히 고찰하면, 맹자와 순경 사이에 다른 인물이 합전된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즉 이 강연과 마찬가지로 산재(散在)되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결합해서 전체적인 줄거리를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후자는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을 중심으로, 공자를 존숭했던 사마천이 『논어(論語)』를 역사가로서 비판적으로 접근한 배경과 방식을 상세히 소개했다. 사마천은 공자의 가르침을 자신의 시각과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그 맥락을 독해하는가 하면, 『논어』 텍스트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역사 속 공자라는 한 거인의 자취를, 수백 년 후 사마천이라는 다른 거인이 어떻게 짚어보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강연과 관련 논문들을 읽고, 사료를 읽을 때 개인이나 후대의 주관을 투영하는 것이 아닌, 철저한 원전 독해를 통해 그 내적 원리를 이해해야 하며, 다른 텍스트들과의 비교 분석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강연자의 언급대로,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게 아니라, 작자(作者)가 왜 이것을 여기에 썼을까.”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후기를 쓴 것도 사마천과 『사기』를 그동안 ‘손쉽게’ 보고 활용해 왔던 필자의 무지를 조금이나마 반성하기 위함이었다. 사마천은 자료적 한계 속에서도 사실(史實)을 인과 관계에 따라 차근차근 누적해 가며 저술한 역사가였다. 강연자의 언급에 따르면 이는 모든 역사 연구자의 귀감(龜鑑)이라 할 수 있다. 이 강연 영상이 『사기』를 고대사 공부의 자료로 활용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정우(필자 소개):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 고대사를 공부 중입니다. 작년 『중국고중세사연구』에 이리강(二里崗) 상(商) 문화에 관한 글을 투고했고, 고대문명연구소의 중국 문명 강연에 대한 후기(『周易』, 『系年』 등)도 작성하고 있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