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이집트로의-초대,

사형을 당한 파라오

곽민수 곽민수 Feb 22, 2021
사형을 당한 파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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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역사에 있어서 제 2 중간기(기원전 1650-1550년)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남북으로 갈라진 두 개의 왕국 사이에 격렬한 군사적인 다툼이 있었습니다. 북쪽 텔 엘-다바(아바리스)에는 힉소스 계통의(아마도 서아시아 출신) 15왕조가 자리잡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테베(오늘날의 룩소르)를 중심으로 하는 17왕조가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남북조 시대’였던 셈입니다. (현대의 한반도가 떠오르기도….)

특히 기원전 1560년 경이 되면 두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북쪽 왕국의 파라오였던 아페피(Apepi)는 남쪽 왕국의 세케렌라 타오(Seqerenra Tao)에게 보낸 서신에서 ‘테베에서 하마들이 우는 소리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라고 쓰기도 했었습니다. 텔 엘-다바와 테베는 약 800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으니, 당연히 하마 우는 소리가 들릴리는 없었을테고, 그냥 생트집이었던 것이죠. 실제로도 남쪽의 전력은 북쪽에게 다소 밀리는 추세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남쪽 17왕조의 파라오였던 세케렌라 타오의 미라입니다.

세케렌라 타오의 미라는 데이르 엘-바흐리에 있는 ‘왕실 은닉처’에서 1881년에 발견되었습니다.(사진1) 이때에 이곳에서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람세스 2세나, 람세스 3세, 세티 1세, 투트모스 3세 등 신왕국 시대 파라오들의 미라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케렌라 타오의 미라에서는 매우 독특한 (이라고 쓰고 ‘잔인한’으로 읽으셔도 좋습니다) 흔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두개골이 도끼 같은 것으로 부셔져 있고, 단검으로 목을 찌른 듯한 흔적이 시신에서 확인 것이죠. (사진2) 19세기 후반에 육안으로 확인되었던 이러한 상태는 1960년대에 있었던 엑스레이 조사를 통해서 더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사진1: 데이르 엘-바흐리의 ‘왕실 은닉처’ 위치. 바로 인근에는 하트셉수트의 장례신전이 있습니다.

사진2: 세케렌라 타오의 두개골 (사진촬영 1912년)

이와 같은 시신의 훼손 상태를 근거로 연구자들은 세케렌라 타오가 15왕조와의 전투에 출전했던가 전장에서 살해당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암살설’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 세케렌라 타오의 미라 역시 다른 신왕국 시대 파라오들의 미라와 함께 현재 이집트 박물관의 ‘왕실 미라실’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이 파라오들의 미라는 곧 ‘국립 이집트 문명 박물관’으로 이전될 예정이지만) 그런데 최근 세케렌라 타오의 미라에 대해 이루어졌던 새로운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바로 이 미라에 대해서 세계적인 이집트학자 자히 하와스와 카이로 대학교의 사하르 살림 교수 공동 연구팀이 컴퓨터 단층촬영(CT촬영)하였고, 그 촬영을 토대로 몇 가지 새로운 가설을 제안한 것입니다. 그 내용을 요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파라오는 사망 당시 40대 초반이었다.
  2. 파라오의 미라에는 도끼와 단검에 의한 상흔 이외에도 다양한 상흔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은 미라 제작 과정에서 교묘하게 감춰졌다.
  3. 세케렌라 타오의 미라는 원래도 손목이 꺾여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손을 뒤로 결박당한 결과로 생긴 기형일 가능성이 크다.
  4. 미라에 남아 있는 상흔들은 힉소스 세력이 사용하던 무기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진 3, 4)
  5. 3과 4를 근거로 할 때, 세케렌라 타오는 전장에서 전사했다기 보다는 전투에서 적에게 포로로 사로 잡힌 뒤, ‘결박당한 채’ 어디론가 이송되어 그것에서 처형 의식, 즉 사형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5번 항목이 이번 연구결과의 핵심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파라오가 전장에서 전사한 것도 아니고, 적에게 사로잡혀 사형당했다고 한다면, 세케렌라 타오의 뒤를 이은 파라오들이 힉소스에 대해서 보였던 매우 큰 적개심이 쉽게 이해됩니다.

사진3: 힉소스 세력이 사용하던 도끼.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소장. (사진출처 : 이집트 고고부)

사진4: 힉소스 세력이 사용하던 단검.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소장. (사진출처 : 이집트 고고부)

세케렌라 타오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이었던 카모세(Kamose)가 17왕조의 왕위를 이어 받았습니다. 위대한 전사였던 카모세는 불리했던 전세를 ‘전격작전’을 통해서 역전 시켰습니다. 카모세가 이끌던 17왕조 군은 힉소스(15왕조)의 수도였던 텔 엘-다바를 포위하는 전과를 거두었지만, 안타깝게도 카모세는 힉소스 세력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그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동생이었던 아흐모세(Ahmose)였습니다.

사진5: 파라오 아흐모세의 미라. 룩소르 박물관 소장. 다른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 미라들이 다 카이로에 있는 것과는 달리 아흐모세의 미라는 룩소르 박물관에서 소장되고 있습니다. 아마 룩소르를 기반으로 하는 신왕국 이집트의 창시자이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흐모세는 아버지와 형의 위업을 물려받아 결국 힉소스 세력을 이집트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결국에는 네게브 사막에 위치한 샤루헨 지역까지 추격하며 궤멸시킵니다. 그렇게 이집트는 다시 통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해서 탄생한 것이 ‘신왕국’입니다. 이집트 신왕국은 아흐모세 이후로 약 500년 간 번성하며 근동지역의 여러 제국들과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을 하게 됩니다.

이 글은 곽민수 연구위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 (원글 바로가기)

곽민수
고대 이집트의 의례 경관와 사회문화 변동, 그리고 개인 행위수행자와 물질문화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