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인류 최초의 사기꾼으로 인터넷 유머글에 소개된 에아-나찌르(Ea-naşir)의 이야기는 사기꾼의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엄밀히 이야기하면 최초의 제품 품질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당시의 생생한 삶의 한 단면을 담고 있는 그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그의 집에 남아있던 토판을 살펴보면서 그가 누구였고 왜 그가 인류 최초의 사기꾼으로 취급받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가 살던 시대는 고대 근동의 긴 역사 중에 고대 바벨론 시기(기원전 2000-1600년대)였는데 그와 관련된 문서가 발견된 우르는 라르사 왕조의 영향을 받는 곳이었다. 당시 우르는 구리가 딜문에서 배를 통해서 메소포타미아로 들어오는 입구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반면 딜문은 국제적인 물건들이 사고 팔리는 시장의 역할을 하는 중립적인 공간이었다. 비단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상인 뿐만이 아니라 마칸(Makkan)이나 메루하(Meluhha)같은 다양한 지역의 상인들이 그곳을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구리, 상아, 귀금속 구슬 등 다양했다. 우르와 딜문 사이를 연결하는 해양 무역의 중심에 선 상인들은 알리크 테문(alik Temun)이라고 불렸는데 그들은 우르에 기반을 둔 자본가들과 손을 잡고 딜문 섬에 막대한 양의 구리를 사러 가고는 했다. 해양 무역에 종사했던 상인들은 육로를 통해서 무역을 하는 상인과 대비해서 보다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당시 딜문의 무역은 소수의 사람들 손에 있었는데 이는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바닷길을 항해하는 기술이 있어야 했고 동시에 딜문 섬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바닷길은 언제나 안전한 것이 아니었고 때문에 상인들은 여행과 사업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 종종 닌갈(Ningal)여신 에게 봉헌물을 올렸고 그녀의 보호를 빌었다.
에아-나찌르는 이러한 딜문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정보가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르라는 지역이 발굴되면서 부터였다. 이 도시에 일반사람들이 살던 거주지 2곳이 발굴되었고 발굴 상황은 상당히 좋았다. 이 두 곳의 발굴지 중 하나가 “AH Site”라고 불렀는데 그 구역은 부유한 사업가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무역을 위해서 돈을 모으거나 혹은 건물을 임대해서 임대료를 받아 돈을 굴렸는데 그들의 이러한 재산 운영 방식이 이 거주지에 나온 문헌들에 자세히 드러나 있다. 당시 이 사람들의 부유함은 그들이 살았던 집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고대 근동에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건조된 진흙으로 만든 벽돌을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다. 구운 벽돌을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했지만 구운 벽돌은 한차례 구워내야 하는 공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만드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다. 때문에 방수기능이 있는 구운 벽돌은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거주지의 집들의 자재에서 구운 벽돌이 자주 발견된다. 이는 그들의 부유함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이 “AH Site”에는 발굴자들이 “Old Street”라고 이름 붙인 길이 있다. 이 길 위에 존재하는 번호 1번을 달고 있는 집이 바로 우리의 주인공인 에아-나지르의 집이다. 이 집에 대한 조감도는 다음과 같다. 집은 공간적으로 총 7개로 나누어져 있고 모든 방들의 바닥은 구워진 벽돌로 되어 있었다. 7번은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었는데 이 공간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서 토판이 발견되었다. 2번 공간은 방이 아닌 건물의 중심이 되는 공간인 중정으로 이 공간을 둘러싸고 방들이 존재했다. 3번 방은 남쪽으로 난 아주 좁은 방이었고 그 옆에 4번 방은 계단이 있어서 올라가면 화장실 그리고 옥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장 커다란 방은 5번과 6번이었는데 5 번과 6 번방 아래에는 아치형 천장을 가진 묘가 발견되었다.
그 집에서 나온 문헌들은 에아-나지르의 개인적인 삶을 잘 보여준다. 그 중에서 아마 사람들의 흥미를 가장 끄는 것은 UET V 81 문서일 것이다. 이 문서가 바로 에아-나지르를 최초의 사기꾼으로 만들었던 문서이다. 글을 쓴 사람은 에아-나찌르와 무역을 같이 하던 난니(Nanni)로 그는 에아-나지르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에아-나찌르는 그에게 좋은 구리만을 보내줄 것이라고 약속을 했지만 글쓴이가 받은 것은 질이 나쁜 구리였다. 글쓴이는 자신을 어떻게 이렇게 대할 수 있으며 딜문 상인 중에 누가 자신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고 화를 냈다.(l. 16-27) 글쓴이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그를 대신해서 에아-나찌르에게 전령을 보냈는데 그 전령에게 질 나쁜 구리를 가지고 가든 아니면 빈손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했다. 당시 우르가 위치해 있던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과 페르시아만 윗부분은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은 지역이어서 그 지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헤치고 간 전령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결례였다.
더욱이 문화적으로 전령을 잘 대접하는 것은 그를 보낸 사람을 잘 대접하는 것과 동일시 되는 것이 고대 근동 관례였다. 에레쉬키갈과 네르갈 신화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잘 들어나는데 그 신화에서 네르갈은 에레쉬키갈이 아누의 궁으로 보낸 그녀의 전령인 남타르에게 적절한 예우를 하지 않았고 그러한 그의 행동은 신화에서 남타르를 극진히 대접했던 다른 신들의 행위와 비교되며 문제시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 안에서 살아가던 글쓴이가 자신이 보낸 전령을 홀대한 에아-나지르의 행동을 마치 자신을 홀대하는 것처럼 화를 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에 더불어 당시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세금을 납부해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궁궐의 개입은 아마도 구리가 무기를 생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당시 왕이었던 라르사의 림-신왕의 군사 행동에 무기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게 학자들의 견해다. 당시 글쓴이는 에아-나찌르와 무역을 하기 위해서 궁궐에 이미 1080 파운드의 구리를 납부한 상황이었다. 이 사실은 아마 그를 더욱더 화가 나게 만들었을 것이다. (l. 33-39) 그는 앞으로 질 좋은 구리가 아닌 경우는 자신이 받지도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편지를 마무리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에게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에아-나찌르는 사기꾼으로 보였을 수 있다. 만약 에아-나찌르를 법정으로 데리고 간다면 그는 어떠한 처벌을 받았을까? 지금으로써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할 만한 동시대의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어림잡아 짐작은 해 볼 수 있는데 이 시기보다 천년 뒤에 신 바벨론 시기에 사기는 일반 절도 행위보다 심하게 처벌 받았다. 신바벨론 시기 일반 절도 행위는 보상, 2배로 갚기가 일반적이었고 드물게 4배로 갚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처벌이 내려지지는 않았다. 반면에 사기의 경우 속이려는 행위가 적극성을 띄기 때문에 더 강하게 처벌이 내려졌고 일반적으로 손해 금액의 10배로 갚아야 했다. 신바벨론 시대의 법률은 고대 바벨론 시대의 법률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법의 근저에 흐르는 정신은 상당한 부분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때문에 에아-나찌르가 고대 바벨론 시대의 법정에 이 사건으로 서게 된다면 아마 그의 행위는 당시 일반 절도보다는 강하게 처벌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표지 이미지 저작권: ©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