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술(崔述, 1740-1816)과 토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 1715-1746)를 동시에 만났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중국 고대사학자인 고힐강(顧頡剛, 1893-1980)이 약 100년 전부터 주도한 의고학풍의 원조다. 고대 문헌의 신빙성을 의심하여 고대사의 우상을 파괴한 천재라는 점에서는 고힐강과 비슷하지만, 활동 당시에 이미 상당한 환호를 받았던 고힐강과 달리 최술과 토미나가는 사후 한참 지나서야 그 진가가 재발견되었다.
(최술)
오늘날 하북성 한단(邯鄲, 청대에는 대명부大名府)의 가난한 선비 집안 출신 최술은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 지역에서 치르는 향시에 합격해서 거인(擧人)이 되었지만, 최종 시험인 회시(會試)에는 두 차례 낙방했다. 최술을 가르친 부친은 경전을 완전히 암기하기 전까지 주석을 못 보게 했다. 이러한 가학 전통이 결국 경전에 대한 최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낳게 했지만, 정통으로 인정된 해석에 의거에서 답안을 써야 하는 과거에 친화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가난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50대 후반이 되어서야 복건성의 조그만 현들 지현으로 5-6년 벼슬살이를 했다.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청렴의 대가는 여전히 곤궁한 삶이었다. 공부마저 하기 어려웠으니 후회막급이어서 여러 번 사직서를 낸 끝에 63세에 귀향했다. 이후 10년이 최술 학문의 전성기였다. 유가 경전의 원 의미가 후대에 위서들로 인해 견강부회된 부분을 꼼꼼히 고증해낸 최술의 고대사 변증은 36권에 달하는 ❬고신록考信錄❭이라는 위대한 역작을 낳았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부풀려진 고대사 바로잡기 시도였다.
최술의 저작은 그의 학문을 제대로 알아본 운남성 출신 제자 진리화(陳履和, 1761-1825)와의 기구한 인연 때문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1792년 북경에서 잠시 동안의 운명적 만남 이후 편지 이외에 서로 대면한 적도 없었다. 지방관을 전전한 진리화는 숭배하던 스승 최술이 남긴 저작 출간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 업은 그마저 죽고 나서야 완결되었다.
훤칠한 키에 삐쩍 마른 솔직담백한 최술은 여복도 있었다. 학자 집안 출신 평생의 반려자 성정란(成靜蘭)은 최술의 최고 후원자답게 아래와 같이 남편에 대해 노래했다:
“뛰어날사 최 선생 그 뜻 예사롭지 않아
세상을 위한 큰 포부 사람들은 모를세라…
반평생 공들인 몇 편의 글
대단하건만 아는 이 없어 애석토다
장안의 과거 길 늘 헛걸음
십 년의 길고 긴 마음고생
그래도 주고받는 술 한 잔에 마음은 느긋하여라
불현듯 날아올라 큰 뜻 펴는 날엔
세상의 허튼 수작 바로잡으리”
성정란이 장담한 세상의 허튼 수작은 최술이 죽은 후 84년이 지나서야 바로잡힐 기회를 얻게 된다. 이 역시 기구하다. 1900년 일본에서 온 유학생으로 뒤에 저명한 중국철학사가로 성장한 가노 나오키(狩野直喜)가 북경의 한 서점에서 진리화가 찍은 원판 ❬고신록❭을 발견했다. 심상치 않은 책임을 간파하고, 일본 동양학의 시조인 나카 미치요(那珂通世, 1851-1908)에게 전달했다.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본 나카는 2년 동안 공을 들여 구두점을 찍고 1903년 ❬최동벽선생유서❭를 출간했다. 동아시아의 근대를 주도하던 일본에서 최술이라는 중국인이 100년 전쯤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한 신화와 전설이 뒤엉킨 중국 고대사 바로잡기에 대한 환호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나카 미치요의 제자인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는 1909년 동양협회 평의원회 강연에서 “요순우말살론”이라는 유명한 강연으로 화답했다. 그는 사실 1895년 「단군고」라는 논문에서도 유사한 논리를 펴서 한국판 식민사학자 1호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한국 고대사학계의 화두인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당시 의고가 휩쓴 일본 학계의 작은 부산물에 불과하다.
최술은 1921년 중국으로 역수출되었다. 역시 대단한 호응을 얻어서 1936년 고힐강이 표점한 ❬최동벽유서❭가 출판되었다. 그 시기 동안 고힐강이 주도한 고사변 혹은 의고 학풍은 중국 학술계를 뒤집어놓았다. 최근까지도 고힐강이 당시 일본에서의 의고학풍에 영향을 받았을지 여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여기까지 최술에 대한 서술은 주로 이재하 등 역주, ❬수사洙泗고신록❭, 한길사 2009에 실린 이재하의 “공자의 진면목을 복원한 「수사고신록」”을 인용한 것이다. 국내에서 나온 최술에 대한 최고의 명문이다).
그런데 의고 학풍의 원조는 최술로 끝나지 않는다. 더 이른 원조격인 토미나가 나카모토라는 요절한 천재가 남아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