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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고疑古의 원조 2

심재훈 심재훈 Mar 14, 2021
의고疑古의 원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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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1980년대까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 일본의 동양사 연구는 두 축으로 진행되었다. 나카 미치요와 시라토리 구라키치 등에서 비롯된 도쿄대학과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1866-1934)과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 등으로 이어지는 교토대학이다.

고대사 연구에 관한 한, 두 축 모두 의고학풍이 대세를 이루었다. 앞글에서 언급한대로 나카와 시라토리가 최술의 ❬고신록❭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면, 나이토의 의고는 일본의 내재적 학풍으로 그 맥이 이어진다. 물론 양측 모두 공유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나이토는 아직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1893년 ❬일본인❭이라는 잡지에 오사카의 조닌町人 학자 토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 1715-1746)를 소개했다. 그 때까지 거의 무명이었던 토미나가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탁월한 식견으로 예전 사람이 결코 이를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너무 앞서 가서 알려질 수 없었던 토미나가에 대한 숭배와 안타까움이 베어있었다.

최술보다 25년 일찍 오사카의 상인 가정에서 태어난 토미나가는 부친이 후원한 오사카의 가이토쿠도(懷德堂)에서 수학했다. 그 실용적 학풍에 영향을 받았지만 15세 때 이미 지금은 유실된 ❬설폐説蔽❭라는 저작에서 논어와 맹자 등 고전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즉, 자신이 보기에 수사적이고 격정적인 고전에서 성인의 도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하여 논어와 맹자를 최고의 경전으로 삼은 가이토쿠도에서 파문당하고 만다.

24세 때 저술한 ❬늙은이의 글翁の文❭에서는 당시 주류 학문인 유교와 불교, 신토에 대해 비판한다. 전래된 문헌을 통해서 유교와 불교의 원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두 교리가 일본으로 전래되면서 변질되었을 것임을 지적했다.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토 역시 당대에 이미 그 원래의 요소가 사라졌다고 보았다. 이것들에 대한 대안으로 토미나가는 현재를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참 진리, 즉 일상샐활에서의 합리적 행위와 함께 개개인의 취향에 따른 지성적, 심미적 추구를 중시했다.

사망하기 1년 전 출간한 ❬출정후어出定後語❭는 불교 비판서다. 여기서 나이토가 주목한 토미나가 판 의고의 원리가 등장한다. 토미나가는 방대한 불교 경전에서 교파 간의 경쟁으로 인한 역사 서술 상의 원칙 하나를 발견한다. 즉 후대의 교파일수록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더욱 오랜 연결 고리를 고안해낸다는 것이다. 토미나가가 “가상加上원칙”으로 명명한 이 이론에 대해 나이토는 원래 있었던 작은 시작이 후대 사람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더 위로 소급됨으로써 점점 더 대단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고힐강이 최술의 학설을 발전시켜 제시한 이른바 “누층적으로 조성된 고대사”의 일본식 버전이다. 나이토는 에도시대에 논리적 기초 위에서 자신의 연구 방법을 창출한 건 토미나가가 유일했다고 강조한 바 있다.

토미나가의 기발함은 최술과 비교할 때 더 빛난다. 근본적으로 유학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웠던 최술은 요순우와 공자 등 성인의 도를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서 ❬고신록❭을 저술했다고 한다. 20세기 초반 이래 상식이 된 신화전설적 요순우의 실존에 대한 의문 자체가 원초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요순 관련 고사의 다양한 모순을 지적한 ❬당우唐虞고신록❭에서조차 그 실존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 확신으로 인해 여러 모순들의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 그답지 않게 눈을 감고 있다. 청대 고증학의 한계이자 전통의 짐이 너무 무거웠던 중국의 한계였다.

물론 당시 일본에도 유학의 굴레는 여전히 컸다. 그래도 상인 출신으로서의 신분적 자유로움과 실용성, 유학의 모순을 발견한 선배 학자들(이토 진사이나 오규 소라이)의 영향 등이 토미나가의 우상파괴적 주장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문제는 지나친 조숙함이다. 나이토 이전에 일부 국학자들이 토미나가의 사상에 주목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신토까지 부정한 그 이단아를 찬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너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더 큰 학문의 꽃을 미처 피우지 못해서 차라리 극적인 면도 있다.

최술을 읽다 우연히 발견한 토미나가 나카모토에 유레카를 외치며 미흡하게나마 몇 자 적어 보았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더욱 궁금해진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어권에서도 상당한 연구가 되어 있고, 최근 중국에서도 그를 주목하는 연구가 나오고 있지만, 국내에는 아직 그에 대한 연구나 소개조차 없는 듯하다.

그래도 일본근대사상 방면의 좋은 책을 많이 번역한 김석근 선생이 번역한 고야스 노부쿠니, ❬일본근대사상비판❭ (역사비평사, 2007), 제2부 1장의 “나이토 고난과 ❬지나론❭”(125-132쪽)에 토미나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유용하게 참고했다.

문득 ‘한국 학술사에서 최술이나 토미나가 나카모토, 고힐강에 버금가는 인문학적 우상파괴가 이루어진 적이 과연 있었을까’라는 생각에 이른다. 혹시 예나 지금이나 그런 토양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거라면 그건 비극이다. 인문학 전반의 수준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심재훈  
고대 중국을 조금 알고 나니 그에 버금가는 다른 문명의 상황이 궁금해집니다. 새로운 출토자료를 활용하여 중국 고대사를 주로 연구하고, 동아시아 사학사, 기억사, 고대문명 비교 연구에 관심이 있습니다. academia.edu/JaehoonSh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