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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鄂, 악鄂

심재훈 심재훈 Sep 05, 2020
악鄂, 악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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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가 안 그러랴만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일이 더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몇 년 만에 또 어렵게 석사 한명을 배출하며 여러 상념에 휩싸인다. 학부 때부터 지도해온 제자 소동섭 군이 ❬상주商周시기 악鄂의 역사지리 재검토: 고문자와 전래문헌 오독誤讀의 함정❭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1세기의 중국 고대사 연구는 점입가경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새로운 출토자료들로 고차원적 방정식을 산출케 한다. 소동섭 군은 갑골문과 청동기 금문, 초나라 죽간 등 출토문헌 뿐만 아니라 청동기 위주의 최신 고고학 성과까지 활용하여 상주시대 악(鄂 혹은 噩)이라는 정치체의 역사지리 문제를 천착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유명해진 중국 후베이성의 모든 차는 鄂(악)에서 시작하는 번호판을 달고 다닌다. 후베이성 사람들이 믿고 싶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고대의 정치체 이름을 딴 것이다. 산동성이 제로齊魯, 산시山西성이 진晉으로 시작하는 번호판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악이라는 정치체에 대해서는 전래문헌 기록이 거의 남겨져 있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 은본기❭에 악의 군주(악후鄂侯)가 상나라의 마지막 폭군 주왕紂王에 의해 삼공三公 중 하나로 봉해졌으나 왕의 악행에 대해 간언한 탓에 포로 떠지는 잔혹한 형벌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 밖에 그 지리 관련하여 후대의 산발적인 기록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지만 고문자라고 부르는 중국 출토문헌에 악 관련 기록이 심심찮게 등장하여 20세기 초반 이래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특히 갑골문 연구자들은 악으로 추정되는 한 글자에 주목하며 그 정치체가 산시성 동남부에 인접한 허난성의 친양沁陽 일대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했고, 실상 그 이론이 정설로 자리잡아왔다. 이 이론은 위의 ❬은본기❭의 기록과 함께 기원후 7세기 이후의 문헌들에 나타나기 시작한 산시성의 특정 지점에 원래 악鄂이 위치했다는 주장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소동섭 군의 연구는 악이라는 정치체가 중원인 산시성과 무관하게 후베이성에서 토착세력으로 성장했음을 밝힌 것이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활용한다. 그 첫 번째로 고문자 자료를 활용하여 갑골학자들이 악(噩/鄂)으로 추정했던 갑골문자가 악이 아니라 상(喪)자라는 주장을 강화한다. 악과 상에 해당하는 모든 고문자를 분석해서 그 오해의 유래와 원인까지 살피며 내린 결론이다. 위에서 언급한 친양 일대에 존재했다는 상나라 때 정치체는 악이 아니라 상이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악과 관련된 청동기와 고고학 유적을 망라해서 검토함으로써 그 정치체가 원래 상 후기부터 후베이성 쑤이저우隨州 일대에서 토착적으로 성장했음을 밝힌 것이다. 나아가 악이 서주 후기에 왕실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왕의 공격을 받고 근거지를 오늘날 허난성 난양南陽 지역으로 옮겼으리라 본다. 최근 난양 일대에서 발굴된 춘추시대 초 악 정치체 군주 묘지의 발굴보고서를 유용하게 활용해서 내린 결론이다. 이는 초나라 죽간 문헌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마지막으로 악을 친양으로 비정하는데 주요 원인을 제공한 ❬사기 은본기❭의 악 관련 기록이 생성된 경위를 추론한다. 사마천이 ❬은본기❭를 쓰면서 주왕의 악행 관련 내용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그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상 후기까지 소급된 악후 고사를 삽입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아가 사마천 당대까지 쑤이저우를 중심으로 한 원래 악의 위치에 대한 정보는 이미 망실되어, 어떤 연유에선가 그 원래 근거지와 무관한 오늘날의 우한(武漢) 일대를 악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을 걸로 본다.

논문의 부제에서 명시하듯 출토문헌과 전래문헌에 대한 학자들(전통시대 학자들 포함)의 오독이 악이라는 정치체가 중원에서 유래했다는 오인을 초래했다는 결론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빛도 보지 못할 이 논문을 완성하기까지 소동섭 군이 “악, 악”을 외치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투여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이 작은 글로나마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 고대사 연구자가 추구해야 할 학문적 수월성은 난해한 자료 해독 능력과 함께 그걸 가능케 해줄 다양한 외국어 습득에서 나온다. 이 논문은 그가 그 첫발을 성공적으로 내딛었음을 입증해준다.

소동섭 군은 박사과정을 위해 중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누구 못지않은 성실성으로 인해 앞날이 더 기대되는 그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심재훈  
고대 중국을 조금 알고 나니 그에 버금가는 다른 문명의 상황이 궁금해집니다. 새로운 출토자료를 활용하여 중국 고대사를 주로 연구하고, 동아시아 사학사, 기억사, 고대문명 비교 연구에 관심이 있습니다. academia.edu/JaehoonSh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