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고대문명연구소 2024년 11월 정기포럼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Zoom 을 이용해 온라인으로 진행됩니다. 관심 있는 분은 누구든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11월 정기포럼 안내
- 일시: 2024년 11월 23일 (토) 오후 2시
- 발표: 김정열 (숭실대 사학과 교수)
- Zoom link: https://us06web.zoom.us/j/87475157122 (회의 ID: 874 7515 7122 / 암호: 5101)
❬좌절과 도약의 교차로: 중국 초기문명 성립의 길❭
중국은 신석기문화 후기 단계에 해당하는 룽산문화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사회복합화의 과정에 진입했다. 고도로 복합화된 사회의 흔적을 남겨놓은 오르도스 일대의 스마오 유적, 황허강 중류의 타오쓰 유적, 양쯔강 중류의 스자허 유적, 하류의 량주 등 기원전 3000년기의 대형 성곽 취락 유적은 고대 중국의 문명화 과정에서 획기적인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들 대형 성곽취락 유적은 기원전 2000년경을 전후하여 하나하나 붕괴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전역에서 관찰되는 붕괴는 극심한 기후변동과 관련되어 있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후변동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붕괴는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요인과 상당한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룽산문화기 대형 성곽취락의 붕괴 원인에 대해서는 자연환경의 변화와 그에 대한 인간의 대응 등 두 가지 측면이 두루 고려되어야 한다. 룽산문화기 대형 성곽취락의 붕괴 이후 기원전 19세기경 황허강 중류의 뤄양분지 일대에서 돌연 그에 비견할만한 얼리터우 유적이 출현했다. 룽산문화기의 대형 성곽취락과는 무관한 허난성 중서부의 뤄양분지 일대에서 돌연 거대 취락 얼리터우가 출현하고 성장한 원인을 설명하기 얼리터우의 자연환경과 그 지리적 위치가 주목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왜 얼리터우문화기에 들어 얼리터우 유적에 급격한 인구증가가 일어났는지, 또는 현격한 진보와 함께 체계적인 도시가 건설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빠져 있다. 얼리터우에서 일어난 문명의 ‘신생’은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통치계층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다. 얼리터우에서는 혈연집단의 계층적인 재편성과 공통의 이데올로기 구축을 통해 내적 통합을 달성하고, 위세품의 적극적인 생산과 관리, 위세품과 일상생활용품의 생산과 교역을 통해 얼리터우를 물자의 집적과 교환의 중심지로 정착시킨 통치계층의 전략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얼리터우의 통치계층의 혁신적인 창안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얼리터우는 그에 선행하거나 또는 동 시기 여러 지역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흡수하고 통합함으로써 그 진보를 달성했다. 다양한 지역의 문화전통이 얼리터우에 모이고 또 선택적으로 수용된 것은 혈연집단의 집적에 기반을 둔 대형 취락, 통치계층의 직접적인 수공업 통제, 취락 중심부에 위치한 대규모 의례공간, 위세품의 생산과 분배를 통한 광역적 취락체계 구축과 유지 등에서 골고루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얼리터우 취락은 북방의 황토고원부터 남방의 양하 유역 일대에서 꾸준히 진행되어 온 문명의 흐름을 수용하고 계승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얼리터우의 단계에서 확실히 모든 것이 발전했다. 즉 얼리터우는 룽산문화기를 마감하는 시기에 발생한 자연환경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주변지대에서 신생의 형태로 출현하였지만, 그것이 신석기시대 이래 중국 각지에서 발전해 온 전통과 경험을 계승하는 동시에 더욱 발전된 사회 구성 모델을 제공했다. 환경의 변화와 제약 그리고 그것에 대응하는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 특히 얼리터우 통치계층의 전략은 문명의 붕괴를 극복하고 이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