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송도에 새로 지어지는 국립박물관이 있는데요. 2023년 개관 예정인 ‘국립세계문자박물관’입니다. 고대문명연구소 2022년 7월 정기포럼에서 세계문자박물관의 주요 유물로 등록될 고대 근동 토판을 상세히 알아볼 수 있었는데요. 강연을 맡아주신 윤성덕 선생님은 연세대학교 신학과(BA), 예일대 목회학을 공부하시고, 히브류 유니언 컬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뒤 고대 근동학에서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소장 ‘둥근 방주 토판’(이하 토판)은 고대 근동의 홍수 신화를 담고 있습니다. 토판의 구체적인 소개에 앞서 고대 근동 세계를 관통하는 사고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데요. 그것은 바로 유명한 고대 근동학자 오펜하임(A. Leo Oppenheim)이 설명한 ‘the stream of the tradition’, 우리말로는 ‘전통의 흐름’ 혹은 ‘전통의 물줄기’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이상적인 신들의 세계가 과거에 있었고, 그 흐름이 지금 이어지고 있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보다는 오늘날이 더 나아진다는 진보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오늘날과는 다른 관점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앞으로 소개될 홍수 신화들의 시대적 변용을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 서아시아의 홍수 신화는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윤성덕 선생님은 슈메르어 홍수신화, 악카드어 홍수신화와 길가메쉬 서사시의 홍수신화의 핵심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각 신화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하나씩 짚어 주시는데요. 세상 멸망시키려는 신들의 홍수 계획 => 주인공에게 그 사실을 알게 함 => 주인공의 대비 => 홍수 발생 => 주인공과 주변만 배를 타고 살아남 => 주인공이 신들에게 제사
이 핵심 도식은 홍수신화간의 긴 시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전통의 물줄기’으로 볼 수 있는데요, 전대의 신화에서 계속하여 보강되는 구체적인 내용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이어 윤성덕 선생님은 오늘의 주인공인 토판의 번역과 이를 하나 하나 해석해 주십니다. 앞서 설명한 악카드어 홍수신화의 주인공인 ‘아트라하씨스’ 신화가 토판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다고 짚어주시는데요. 큰 줄기는 유사하지만 상세한 전개는 차이가 나는 것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토판의 내용이 비교적 짧은 것으로 볼 때, 요약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하셨는데요. 이 토판을 왜 ‘둥근 방주 토판’로 호칭하는지 드디어 알 수 있었습니다.
‘배를 지어야 한다. 그것을 그려라. 그리고 둥근 것의 그림을’
배의 형태를 묘사하는 부분이 짧기는 하지만, 위와 같이 확실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히브리어 성경의 창세기 6장의 배의 묘사는 말 그대로 ‘방주’이고, 길이가 매우 긴 것으로 나오는데요. 이와는 꽤 다른 형태로 배의 형태를 설명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신화를 쓴 작가의 관점에 따라 동일한 홍수 신화라도 초점을 맞추는 부분도 달라지고, 디테일도 꽤 차이가 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핵심 유물에 대한 상세한 해석과 소개를 들으니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 개봉 전 시사회에 초청받은 느낌이 이런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시간의 강의 시간이 조금도 길게 느껴지지 않는데요. 이어지는 토론 시간에도 다른 문명권 연구자분들의 흥미로운 질문이 이어집니다.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사진 설명: 영국박물관에서 둥근 방주 토판을 들고 있는 어빙 핀켈 (Sang Tan/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