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넘게 붙들고 있었던 번역이 이제야 책으로 나왔네요. 두려운 마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책의 진가를 알고 숙독해 줄지 궁금합니다.
옮긴이 서문에 제 심정을 담았고, 아래에 그 일부를 발췌합니다.
독일의 이집트 학자이자 문화사학자, 종교학자인 얀 아스만Jan Assmann 교수가 2024년 2월 19일 85세로 별세했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아스만 교수처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지성적 자극을 준 학자는 드물 것이다.
특히 부인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 교수와 함께 구축한 문화적 기억 이론은 내가 종사하는 역사학으로만 한정해도 실증적 연구에 균열을 내면서 다채롭게 그 외연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 고대문명 연구자로서, 문화 이론가로서 얀 아스만의 전방위적 통찰에 감동하는 나는 그의 영전에나마 《문화적 기억과 초기 문명: 문자, 기억하기, 정치적 상상력》의 한국어 번역본을 바칠 수 있어서 영광이다.
이 번역은 내가 40년 가까이 해온 중국 고대사 연구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고대 문헌의 신빙성에 대한 의고疑古와 신고信古 논쟁을 오랫동안 살펴보면서, 고대사 연구에서 추구할 수 있는 실증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나아가 과연 내가 지금까지 실증이라는 이름으로 도출해온 연구 결과를 얼마나 확신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인 고대 자료의 신빙성 여부가 불가해한 것이라면, 그 신빙성 자체와 무관하거나 그것을 넘어선 해석을 시도하면 될 일이다. 2018년부터 내 나름대로 고대 자료의 진위에 얽매이지 않는 연구를 추구해보았지만, 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그때 컬럼비아대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김용하 선생이 얀 아스만의 《문화적 기억과 초기 문명》을 소개해주었다.
그 책을 읽으며 이미 1990년대 후반 이래 국내에서도 기억 연구가 상당히 유행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2000년대 초반 나온 전진성, 최호근, 김학이 등 독일에서 유학한 서양사학자들의 아스만을 비롯한 기억 이론 소개에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문제도 발견했다.
얀 아스만의 학문은 이집트학을 배경으로 한다. 그의 《문화적 기억과 초기 문명》이 실상 고대문명의 문화적 기억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한국에서는 그 소개나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도 대부분 근현대에 치우치고 있다. 특히 내가 보기에 아스만 이론의 핵심인 고대의 문자와 글쓰기 문화를 다룬 제2장 ‘문자 문화’ 부분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다. 이를 토대로 한 고대 이집트, 이스라엘, 메소포타미아, 그리스의 문화적 기억과 정체성 문제를 다룬 2부의 사례 연구도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 아스만의 진정한 통찰은 자신의 이론을 적용한 사례 연구에 담겨 있는데도 말이다.
2020년 가을부터 번역에 착수했다. 초벌 번역을 마치고야 고대 근동과 서양 고대사에 문외한인 내가 참으로 무모한 일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데 때론 무모함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하니 아이러니하다. 이미 아스만의 팬이 된 나는 고대 중국의 상황을 더 잘 알기 위해서 그보다 앞선 문명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이해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중국의 청동기나 문자 시대의 개시는 이들보다 1,500년 이상 늦다.
2020년 8월 국내의 핵심 고대문명(근동, 인도, 중국 등) 연구자들을 모아서 단국대 고대문명연구소를 발족했다. 마침 구미의 유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도 국내의 척박한 현실에 대학에서 시간강사 자리마저 얻기 힘든 인재들을 위한 구심점이 필요하던 시점이었다. 이들과 팀을 꾸려 공부하며 《문화적 기억과 초기 문명》의 번역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와중에 한국연구재단의 일반공동연구사업 ‘문명의 시원, 그 연구의 여정과 실제’ (2022~2024년),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 ‘고대 근동과 중국, 문헌 전통의 물줄기’ (2023~2029년)를 수행하게 되었다. 순항 중인 고대문명연구소의 기반이 아스만 책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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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아스만이 《문화적 기억과 초기 문명》을 출간한 지 이미 30년이 넘었다. 해묵은 독일발 이론을 국내에 재차 소개한다는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이미 고전 반열에 오른 듯한 이 책의 많은 내용은 아직도 유용해 보인다. 나는 특히 서양 중심주의나 오리엔탈리즘 타파의 기치를 내세우는 국내의 연구 경향에서 시대착오와 내실의 결여라는,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발견하곤 한다. 인류의 문화 인식 전반에 “문화적 기억”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통찰을 인문학의 새로운 활로를 고민하는 연구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내 전문 분야인 고대사로만 한정하면 그 통찰의 핵심은 문화적 기억으로서 고대의 문헌들이 창출되는 메커니즘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고대문명들의 상이한 성쇠 과정이다.
번역을 마감하여 책으로 내려는 시점에 혹시 오역은 없는지, 더 쉬운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없는지 우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워낙 난해한 책이라는 사실이 변명의 여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시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두 역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도 얀 아스만 교수가 자신의 영전에 바쳐진 이 번역본을 반기리라 기대하며 그의 명복을 빈다.
이 글은 심재훈 교수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 (원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