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영, ❬유사역사학비판: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역사비평사, 2018)
글 깨나 읽는 사람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는 말이 안 되는 글을 읽어야 하는 경우일 것이다. 쉽게 발분하는 천성을 지닌 나는 연구자들의 논문 심사를 하다가도 격분하는 경우가 꽤 있다.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인 2003년 어느 날 한 논문을 읽다 화가 난 상태에서 병원에 갈 일이 있어 혈압을 재어보니 200 훨씬 이상으로 올라가 있었다. 건방지게 들릴 수 있는 에피소드이지만 혈압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날이 그 날이어서 잊기 어렵다.
요즘이야 많이 익숙해졌고 대충 심사하는 요령도 터득했지만 그런 글을 읽어야 하는 경우는 여전히 고역이다. 그래도 연구논문이야 논리의 허점이나 자료 활용상의 문제 등 약점을 지적하기 쉬우니 그나마 나은지도 모르겠다.
이런 측면에서 나 같은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극심한 고통을 잘 감내한 결과 세상에 빛을 본 책이 있다. 이문영 선생의 ❬유사역사학비판❭이다. 고맙게도 이 선생님이 작년에 보내준 책을 이번 주말에야 읽어보았다.
역사학도인 이문영 선생은 1990년대 초부터 당시는 ‘재야사학’으로 통칭되던 환단고기 추종자들과 외로운 논전을 벌여온 분이다. 안 봐도 비디오인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이런 큰 용기를 낼 수 있었다니 이 선생님도 나처럼 쉽게 발분하는 성격의 소유자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의를 향한 그의 태생적 본능 역시 별로 표도 나지 않고 돈도 안 되는 이런 일에 헌신하도록 했을지도 모르겠다. 덤으로 따랐을 극심한 비난까지 감내해야 했을 터이니 강한 멘탈을 지녔거나 아니면 그 인내의 와중에 더욱 강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에는 이문영 선생이 25년 동안 고통 속에 쌓은 내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람이 지적으로 성장하는 동기와 과정은 다양하다. 불합리로 철저히 무장된 집단과의 논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연구를 읽으며 논리를 가다듬다 보니 한국 사학사상의 명저로 기억될 만한 이 책을 내기에 이르렀을 것이고. 나를 포함해서 역사학자라는 분들 대부분은 위에서 얘기한 그 고통 때문인지 자신들이 기피한 일을 훌륭하게 해낸 이문영 선생께 큰 빚을 지고 말았다.
이 책은 이른바 유사역사학이라는 전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는 해악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한다. 이어서 식민지시대의 산물인 한국 유사역사학의 뿌리와 그 성장 과정을 일목오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 두 부분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중반은 한국 유사역사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환단고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해부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인 유사역사학으로 인해 일그러진 한국사 23장면은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팩트체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잘못된 인식을 논파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증거와 복잡한 논리 전개가 필수적이다. 이 책이 자칫 일반 독자들에게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어 우려되는 부분이다. 책을 멀리하는 요즘 학생들에게 내가 자주 하는 얘기가 있다. “고통 없이 이루어진 독서에서 건질 건 거의 없다”이다. 이 책은 약간의 고통을 동반한 독서 중에 느낄 수 있는 희열을 선사하는 그런 책이다.
이문영 선생은 자신을 아마추어 역사가라고 낮춘다. 이 책은 그런 그를 전문역사가의 반열로 올려놓는데 일말의 주저도 없게 한다.
식민지 경험의 생채기를 아직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21세기 초반의 한국에서 이 책이 고대사의 환상에 대한 전면적 인식 전환을 가져오리라 보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문영 선생이 스스로 개척한 결과물인 ❬유사역사학비판❭은 최소한 20세기 후반 한국 사학사상의 기현상을 흥미롭게 다룰 먼 훗날의 역사가들에게 단비와 같은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