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벽두에 새로운 역사과학의 성장을 알리는 좋은 책을 읽었다. 데이비드 라이크(김명주 옮김)의 ❬믹스처: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대 DNA 대답(동녘사이언스, 2020)❭이다. 페북에서 만난 경이로운 독서가 중 한 분인 장한별 선생의 글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따져보니 나는 35년 이상 고대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해오고 있다. 대단한 성과를 내지도 못하면서 연륜이 쌓일수록 강하게 밀려오는 한 가지 회의가 있다. 나름 실증 선수인 내가 지금까지 실증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해온 연구 결과를 얼마나 확신할 수 있을까?
가끔 고대 세계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지만 직접 가서 볼 수는 없다. 특정 주제에 대해 이용 가능한 증거를 최대한 활용해서 여러 “경우의 수” 중 가장 그럴듯한 것을 골라내거나 새로운 “경우의 수”를 만들어낸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한계만이 아니라 연구자 개인의 선입견이 개입될 여지까지 상당하다. 오염되지 않은 고대의 자료를 찾기도 어렵다.
나 같은 고대사가들을 솔깃하게 만드는 고고학 증거가 있지만, 우연적 발견이라는 한계가 뚜렷하다. 땅속을 다 파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나는 요즘 고대사를 기억사 측면에서 재구성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실증의 한계를 이론과 상상력으로 커버하려 해보지만, 이 역시 어느 정도는 실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마뜩찮아도 실증은 여전히 역사 연구법의 기본이라는 딜레마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강력해 보이는 실증으로 전통 역사학에 도전하는 이들이 있다. 과학자라고 명명하는 게 더 적절한 연구자들이 네이처나 사이언스 등 저명 저널에 역사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논문을 써내고 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자료가 그 기반이다.
그 첫 번째가 디지털 역사학이라 부르는 정량적 연구로 과거의 특정 패턴을 찾아내는 데 아주 유용하다. 이전에도 부지런한 연구자들이 추구했던 방식이지만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다룰 수 있는 자료의 양이 구멍가게에서 대형마켓 수준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 두 번째가 바로 ❬믹스처❭에서 다룬 고대인의 DNA 자료를 활용한 역사 유전학이다. 2010년경부터 독일의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는 고대인의 뼈에서 DNA를 효율적으로 추출해내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2013년 문을 연 저자의 하버드대학 연구실에서는 이 기술을 응용하여 엄청난 양의 고대 DNA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수만년 전부터 수천년 전 사이에 전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게놈, 즉 유전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예전에 고고학이나 언어학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정확하게 고대인의 집단이주와 뒤섞임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일관되게 관통하는 논리는 인류의 “교잡”이다. 기원전 5만년경 아프리카를 떠난 현생인류는 유라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로 퍼지면서 구인류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구인류를 대표하는 네안데르탈인과 새롭게 발견한 구인류인 데니소바인 등과 빈번하게 교잡했음이 밝혀졌다(2장, 3장).
고대 유럽인의 형성 역시 1만년 전까지 적어도 다섯 차례에 걸친 이주와 교잡의 산물이다. 9천년 전 중동에서 농경집단이 들어와 현대유럽인을 형성할 때까지 유럽에는 이미 다양한 집단이 존재했다. 인도유럽어의 확산에 대해서 유전자 정보는 ❬말, 바퀴, 언어❭의 저자 데이비드 앤서니가 제시한 스텝가설이 타당함을 뒷받침한다. 오늘날 이란 또는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5천년 전 수레와 바퀴 기술로 발전한 얌나야 문화인들을 유럽으로 이주하여 인도유럽어를 처음 사용하고 퍼뜨린 원조로 보는 것이다. 또 다른 교잡이다. DNA 분석은 얌나야인 역시 교잡의 산물임을 알려준다(4, 5장).
인도 역시 유럽과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9천년 전 중동에서 이주한 이들이 농경이라는 신기술을 가져왔고,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얌나야 집단이 4천년 전 집단 이주하여 그 농경인들과 교잡함으로써 오늘날 인도인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다만 인도는 이 교잡 이후 만들어진 카스트제도로 인해 오랫동안 족내혼이 유지되어 일종의 유전 병목 현상이 일어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오늘날 인도는 많은 작은 집단들로 구성된 국가로 보는 게 맞다고 한다(6장).
아메리카의 경우 아시아에서 시작된 여러 차례의 대규모 집단 확산으로 원주민 집단을 형성했고, 유라시아나 아프라카에 비해 집단 대체가 자주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7장). 동아시아의 경우 아프리카에서 온 현생 인류 도래 이후 중국의 농경 중심지에서 시작된 대규모 집단 이동이 여러 계통을 만들어냈을 것으로 보지만, 현재 중국과 일본의 데이터가 공개되지 않고 있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연구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 다만 중국에 이미 최첨단 DNA 연구실이 설립되어 고대인의 골격 시료를 축적하고 있는 만큼, 곧 중국 발 DNA 혁명 쓰나미가 몰려올 것으로 기대한다(8장). 아프리카의 경우 현생인류가 떠난 이후 상황이 불투명하지만 수천년 전에 대규모로 들어온 농경 집단이 이전에 존재하던 다양한 집단과 교잡하면서 그들을 제압했을 것으로 본다(9장).
마지막으로 게놈혁명으로 인한 유전자 연구가 가져온 사회적 파장에 대해 다룬다. 고대에 이미 집단 간, 성별 간, 개인 간에 불평등이 존재했고, 그것이 번식의 성패를 결정했다(10장). 지난 세기 인류학자들 사이에 정설이 된 인류 집단 사이의 유전적 차이가 미미하다는 가설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고, 그 반대편의 인종주의적 세계관 역시 유전학 데이터와 상충한다. 현재 세계에서 존재하는 많은 집단은 더 이상 순수한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 매우 다른 집단과의 교잡으로 생겨난 것이다. 다만 인종주의의 폐해로 그동안 의도적으로 침묵해왔던 집단 유전의 차이에 대해서는 더 겸허하고 솔직해져야 할 것으로 강조한다(11장).
고대 DNA 혁명을 1949년 윌라드 리비가 발명한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에 뒤이은 고고학의 두 번째 과학혁명으로 보고 있는 저자는 앞으로 인류의 고대 DNA 지도가 만들어져 최소한 새로운 고고학 유적을 조사할 때 참조할 기준틀을 제공할 것이라 한다. 나아가 아직 미개척 분야인 기원전 4천년부터 현재까지의 연구 역시 새로운 방법론이 개발되어 인류 집단 변천에 많은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고 있다(12장).
근래 들어 읽은 책 중에 포스트잇을 가장 많이 붙인 책이다. 그만큼 새로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얘기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고고학자에게 한국의 고대 DNA 축적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한반도 남부가 산성토양으로 이루어져 고대 인골이 잘 보존될 여건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제천 황석리 청동기유적의 인골과 가덕도 장항 신석기유적의 인골에서 출토된 DNA에서 코카서스인의 DNA가 발견되었다니 무척 흥미롭다. 라이크 교수가 유럽과 인도에 바퀴와 수레를 가지고 이주한 얌나야인의 발상지로 보는 지역이 바로 코카서스산맥 남쪽이다. 북한이 공백으로 남겨져 있어 아쉽지만, 수년 내에 중국의 자료가 공표되어 동북지역의 사례와 비교한다면, 한국인의 기원도 지금까지 인식되던 것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대 한국인 역시 이미 교잡의 산물인 한반도나 중국 동북지역의 고대인들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교잡을 거치며 형성되었으리라는 점이다. 고고학이나 역사학에서 현재적 관점으로 민족의 기원 문제를 다루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유전학 역시 많은 한계를 안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새로운 툴이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를 날을 기다리지만, 내가 직접 이를 연구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다만 과학적 실증을 거친 자료를 토대로 이루어진 연구 성과들을 활용할 수는 있으리라 기대한다. 앞으로 10~20년 사이에 고고학과나 역사학과에 DNA 전문가가 필요할 것이라는 저자의 예측이 현실화되기 바란다. 디지털 역사학 전문가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전통 역사학에서 이러한 새로운 대세를 어떻게 수용해나갈지도 궁금해진다.
고대사 종사자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라이크 교수는 과학자와 인문학자가 결합한 최고의 석학임이 분명하다. 몇군데 실수가 눈에 띄지만 번역도 괜찮다.
마침 1월 24일 고대문명연구소의 정기포럼에서 역사유전학자인 서울대 생명과학부 정충원 교수의 강연이 예정되어 있다. ❬믹스처❭에서 어렴풋이 공부한 내용이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